• 이윤명(李潤明) 이명(異名) 경학(敬學) 자(字)는 동하(東廈)이며, 우계인(羽溪人) 백인당(百忍堂) 장달(章達)의 후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태진(泰鎭)의 아들이다. 1884년 4월 14일 울진군 북면 주인리에서 출생하니 기품(氣品)이 비범하고 총명하여 일찌기 한학을 닦고, 1906년 전국 각 지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자 신돌석(申乭石) 의병장(義兵將)이 영덕과 울진지방에서 창의(倡義)할 때 동의진(同義陣)의 군영장(軍令將)으로 활약하고 1907년 2월에 신돌석진(申乭石陣)과 성익현진(成益鉉陣)과 합세하여 일군(日軍)을 칠때 영해, 영덕, 울진, 삼척 등지에서 활약하고 1908년 흥부 칠보산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고 같은 해 8월에 삼척 기곡에서 전투 중 일헌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獄苦) 중 세상을 떠나니 시년(時年)이 35세 였다.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1983년 8월31일 대통령표창을 받다가 1990년12월25일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제2장 입향 . 수관 64. 우계 이씨(羽溪李氏)
• 이행죽(李行竹) 입향년도는 1630년(인조 8년), 본관은 우계(羽溪), 관직은 수계(壽階)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시조는 이양식(李陽植)이다. 묘소는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사곡(寺谷)에 있고, 자손은 울진군 일원에 있다.
• 이기성(李起成) 입향년도는 1670년(현종 11년),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시조는 이양식(李陽植)이다. 생활상의 사정으로 입향하였다. 묘소는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월증(月增)에 있고, 자손은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에 분포하고 있다.
• 이장달(李章達) 입향년대는 1779년(정조 3년),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시조는 이양식(李陽植), 분파조는 양근(養根) 성근(盛根) 준근(峻根)이다. 생활터전을 찾아 울진에 입향하였다. 자손은 울진, 서울에 있다.
제5편 마을사 제3장 북면
제3절 부구3리(富邱三里) [속칭 : 상흥부(上興富)] 3. 성씨별가구 분포 총 103가구 중 삼척김씨(三陟金氏) 12, 담양전씨(潭陽田氏) 8, 영해박씨(寧海朴氏) 7, 우계이씨(羽溪李氏) 6, 평해황씨(平海黃氏) 4, 한양조씨(漢陽趙氏) 3, 함종어씨(咸從魚氏) 3, 기타 60가구다.
제5장 근남면 제2절 수산리(守山里)
3. 성씨별가구 분포 총140가구 중 우계이씨(羽溪李氏) 30 삼척김씨(三陟金氏) 29, 울진임씨(蔚珍林氏) 12, 울진장씨(蔚珍張氏) 9, 기타 60가구다.
영주문화원보 내고장 인믈
충의편 O 이 성희(李 聖熙 : 1870∼1935) 수형(秀亨)의 후손인데 자는 경집(敬楫), 호는 봉산(鳳山)이다.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를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우국충성(憂國忠誠)으로 울분을 참비 못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다가 뜻을 달리하여 상해(上海)에 건너가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돕기로 하고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조달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아들 교인(敎仁), 교덕(敎悳)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광복단(光復團)에 입단하여 자금 조달에 활약하였다.
효행편 O 이 경춘(李 慶春)과 처 안동권씨(安東權氏) 효행 경춘은 우계인(羽溪인)인데 도촌 수형(桃村 秀亨)의 후손으로서 1897년 5형제중 셋째로 태여났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였다. 모친께서 늙어 우연히 풍비증(風 症)을 얻어 손수 음식을 들지 못하고 기동을 하기에 어렵게 되자 경춘부부는 정성을 다하여 간호에 힘썼으나, 모친인 윤(尹)씨는 워낙 노쇠하였고 기혈(氣血)이 다한 탓인지 백약이 무효하고 별차도가 없었다. 경춘의 처 안동권씨는 태영(泰暎)의 딸로서 남편이 생계를 위하여 밖에 나가면 권씨 부인은 잠시도 시어머니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더욱 봉양하기에 힘썼으며, 대소변을 손수 거두어 드리고 환자의 옷차림도 깨끗이 빨아서 살아 입혀서 방안은 더욱 깨끗이 하였다. 여러 형제 자매가 번갈아 내왕하며 어머니의 봉양을 다투어 청하였으나 부인 권씨는 "시어머니의 불편한 거동이 오직 미안할 뿐아니라. 그 동안의 증세와 식성을 내가 이미 익힌터라 그대로 시병봉양 할것이 오니 걱정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14년간의 긴 세월을 두고 하루도 게으르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니 이를 직접보고 소문을 들어서 서로 서로 알게되어 인근에는 남녀노소가 앞을 다투어 선물을 보내서 더욱 보양토록 하였다.
봉화군청 홈페이지 문화유적 정자
공북헌(拱北軒) 봉화읍 도촌리 사제마을 동산 서쪽에 소재하며 도촌이수형(1435 - 1528)이 조봉대부 평시 서령을 지내고 단종때 이곳으로 내려와 평생을 숨어 살던 옛집이다. 도촌의지세는 동남향으로 집을 짓는 것이 마땅한데 북향으로 집을 지었고 당시의 제도는 방이1칸 이고 마루는 배로 하였으며 3면은 벽이고 오직 북쪽에만 창문을 둔 것은 단종의 능침이 영월에 있는 까닭이라 한다. 창설 권두경, 눌은 이광정의 유기와 시가 있다. 봉화읍 도촌리 사제마을 동산 서쪽에 소재하며 도촌이수형(1435 - 1528)이 조봉대부 평시 서령을 지내고 단종때 이곳으로 내려와 평생을 숨어 살던 옛집이다. 도촌의지세는 동남향으로 집을 짓는 것이 마땅한데 북향으로 집을 지었고 당시의 제도는 방이1칸 이고 마루는 배로 하였으며 3면은 벽이고 오직 북쪽에만 창문을 둔 것은 단종의 능침이 영월에 있는 까닭이라 한다. 창설 권두경, 눌은 이광정의 유기와 시가 있다.
지명유래 봉화읍 도촌1리 사제(沙堤) 이마을은 1450년경에 平時署令(평시서령) 挑村(도촌) 李秀亨(이수형)이 개척한 마을로서 그후손 우계이씨들의 집성촌이며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다고 중국의 산촌지면을 쫓아 武陵桃源(무릉도원)이라 부르다가 이수형 선생이 도학을 숭상하였다 하여 마을명칭을 도지미(道知味)라고 고쳐불렀으나 어느해 낙화 암천이 수해로 범람하여 마을이 온통 모래로 뒤덮여 주민들이 모래로 제방을 막고 큰비 오면 모래제방을 근심하였다하여 사제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